기상자료개방포털 데이터:역사기후:역사자료:조선왕조실록: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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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초부터 남인과 서인의 당쟁에 의해 많은 유신들이 희생됨. 대동법을 전라도에 실시하고, 동철제 활자 10만여 글자를 주조함.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 해시계 등의 과학기구를 창제케함.


보부상은 본래 상품을 보에 싸서 행상하는 봇짐장수 또는 항아장수라 불린 보상주122과, 상품을 지게에 짊어지고 행상하여 등짐장수라 일컬어진 부상주123을 합하여 부르는 명칭이었다. 그런데 지역 단위로 일종의 협동조합과 같은 조직을 갖추어 관으로부터 지역이나 물품에 대해 독점권을 얻어 활동하는 이들의 명칭이 보부상으로 고착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은을 제련하는 기술이 개발되고, 명 및 일본과의 무역이 활발해져 정부의 은광정책과 은광의 경영형태에 많은 변화와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실전에서 크게 전투력을 발휘한 것은 임진왜란 직전에 완성된 이순신(李舜臣)의 거북선이었다. 이 밖에 정약용은 청나라에서 들여온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주195』 중 테렝(Terreng. J., 중국명 鄧玉涵)의 『 기기도설(奇器圖說)』에서 얻은 지식을 토대로 기중기를 고안, 수원화성 축조에 이용하게 하였다. 한편, 삼강오륜의 권장을 통해 왕에 대한 신하의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와 함께 전주(田主)에 대한 전호의 의무까지 하나의 윤리 질서 속에 묶었다. 세종 때 『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만들어 농민들을 가르치고, 그 뒤에도 이와 비슷한 책들이 잇따라 나온 것은 모두 농민교화책의 일환이었다.


만일, 노비가 상전을 고발하면 강상을 어긴 것으로 인정되어 교살죄(絞殺罪)를 적용하였다. 노비 소생은 아버지의 신분이 어떻든 간에 고려시대 이래 적용되어온 수모법(隨母法)주159에 따라 상전 소유의 노비가 되었다. 다만 종친의 2품 이상의 첩자손이나 적자손이 없는 양반의 첩자손 승중자(承重者)에게는 종부법(從父法)주160을 적용하였다. 중인은 대개 기술이나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였으므로 실속이 있고 나름대로 행세를 할 수도 있었다. 예컨대, 역관이 사신을 수행하여 무역의 이득을 본다든지, 지방 향리가 수령을 조종하여 세도를 부린다든지 하는 따위이다.


이조 낭관과 삼사 관원들을 중심으로 질서를 갖추어 문신 당하관들이 당상관과 국왕에 대해 상당히 자율적으로 정치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은 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간 한반도에 존재한 왕조 국가이다. 국왕의 밑에서 양반관료들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어 정치를 행하였다.


좁쌀은 성질이 서늘하여 비위의 열을 없애고 기를 북돋는 작용을 하므로 인삼과 더불어 기력을 보충하는 건강식의 재료로 쓰였다. 내의원에서 인삼속미음을 처방한 주된 이유는 미리 보양식을 섭취하여 영양공급과 더불어 슬픔이나 피로로 인한 질병을 예방하고자 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 왕실에서는 선대 왕과 왕비들의 장례 때 매우 복잡한 절차를 치르는 것은 물론이고 평소에도 많은 국가 제례를 주관하느라 분주한 일정이 늘 짜여져 있었다. 따라서 국왕은 과로에 시달릴 가능성이 많았고, 이에 적절하게 대비할 방법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조선 시대에 왕과 그 친족의 건강관리를 담당했던 기관은 내의원(內醫院)이다.


이제마(李濟馬)의 사상의학(四象醫學)은 인체에 대한 음양오행적 이해를 보여준다. 천연두에 대한 예방 기술 개발 노력으로 인두법을 시행한 사실은 경험 또는 실험에 입각한 귀납적 방법론을 채택하였다는 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1610년(광해군 2)에는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동양의학사상 특기할만한 역저인 허준(許浚)의 『 동의보감』이 편찬되었다.


이들은 첫 사업으로 독립문주58을 세운 뒤 『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강연회와 토론회, 집회 활동을 하여 근대 정치에 대한 지식을 알리고 권리 의식을 전파하였다. 러시아의 내정간섭이 노골화하자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반러여론을 조성하여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주59를 막아내는 목적을 달성하였다. 아직 갑오개혁이 진행 중이던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나고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주55 체결에 이어 삼국간섭주56으로 일본이 요동반도를 차지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일본이 조선에서 누리던 지배적 지위가 급격히 약해졌다. 박영효 내각은 무너지고, 새로 들어선 김홍집 내각에는 미국이나 러시아와 가까운 인사들이 등용되었다. 일본은 이러한 변화의 이유가 조선의 왕비에게 있다고 보고 궁궐을 공격하여 왕비를 살해하여 잠시 세력을 회복하였으나, 이 을미사변은 단발령을 계기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조선 정부는 개항한 뒤에도 기존의 정책을 바꿀 뜻이 없었으나, 결국 청의 요구에 따라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자신이 창제한 훈민정음으로 「월인천강지곡주184」을 짓고, 「 월인석보」를 간행하게 하기도 하였으며, 말년에는 궁궐 안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고 법회(法會)를 행하는 등 불교를 독신하였다. 고려 때 불교가 누리던 국가 종교와 유사한 특권적 지위가 박탈되고, 유교가 그 대신 특권적 지위를 누리게 된 것이다. 이를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국왕을 비롯한 최고 지배층이 도덕적 규범에서 생활 태도에 이르기까지 기준을 제시하던 가치 규범의 지위를 유교만 누리고, 불교는 탈락하였음을 뜻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대개 지방의 유력자인 중소지주층이 그 고장의 자치권을 누려 중앙집권과의 마찰이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중소지주층이 대개 관료신분층으로 전환되면서, 중앙집권적인 통제와 재지 세력에 의한 자치라는 양면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 조상의 제사를 주재하는 일, 가정을 관리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일, 자녀의 교육과 혼인에 관한 일 등이 모두 가장권으로 집약되었다.


면화 생산이 늘자 면포가 쌀과 함께 물품화폐로 기능을 하게 되었고, 나아가 마포(麻布) 대신 정포(正布)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면포와 쌀 가운데 기본 화폐의 기능을 한 것은 저장성이 더 높고 흉년에 가격 변동폭이 더 작은 면포였다. 당시 모내기는 저습지에만 적용하는 농업 기술이었으나, 15세기 중반 이후의 기록에 나타나는 실상은 지대가 높아 물이 찬 곳에서 날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 옮겨 심는 형태가 주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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